농성장을 차리고 투쟁을 하는 이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 윤민진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찾아왔다. 해마다 서울역이나 고속터미널에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리프트 장착 시외 교통수단 마련을 요구하며 명절을 맞이해왔다.
작년 추석에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천막을 칠 때 나는 거기에 없었다. 시외 이동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이 진행되기 전에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독립영화 ‘노들바람'을 보았다. 조금 후에 경찰에 연행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터미널 북쪽 출입구로 가니 이미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천막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몸싸움이 있었을지 상상도 못 했다.
승강장으로 이동해서 우리의 요구가 담긴 현수막을 바닥에 깔고 동지들은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의 동지가 외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소리통이 되어 외쳤다. 그때 나눠준 선전물의 내용은 리프트 장착 시외버스에 대한 것이었다.
올해 추석이 작년과 다른 점은 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활동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농성에 쓸 물품을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준비했다.
서울역에서 농성에 들어간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지한 후에 코레일 직원들이 대학로(대항로) 전장연 사무실로 찾아왔다. 되도록이면 건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집회를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우리는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9월 18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대구시립희망원 입소자 무단 전원조치 진정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동지들이 기자회견이 끝난 후, 서울역으로 행진했다.
대항로에서 가져갈 짐이 많아서 트럭을 돈 주고 빌려서 이동했다. 서울역 동쪽 광장의 북쪽 차단봉을 서울역 역무실에 요청하여 뺀 후 안 쪽으로 이동했다. 서울역 남동쪽 계단 밑에 짐을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서 2층으로 짐을 하나씩 나르기 시작했다. 2층 출입구에 철도공사 직원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행진을 마친 동지들이 출입구가 계속 열려있도록 공간을 확보했고 물품이 건물 내부로 하나씩 들어갔다.
천막이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천막을 친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시골에 유랑단이 도착하여 천막을 치고 공연장을 꾸밀 때 동네 아이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천막을 침으로써 농성장을 만들고 거기서 우리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천막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한 동지가 천막의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천막을 둘러싸고 직원들을 점점 더 멀리 몰아냈다. 몸싸움을 하며 나는 소리를 있는 힘을 다해 질렀다. 그때의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사람들이 들어주었으면 했다. 접힌 천막을 펼칠 만큼의 공간을 확보해야했다. 여기저기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마침내 우리는 서울역 안에 작은 공간의 장애인 인권 운동의 진지를 마련했다.
다음에 할 일은 3층 난간에 우리의 요구가 담긴 현수막을 다는 것이었다. 이 번에도 공사 직원들이 우리를 막았다. 현수막을 손에 쥐고 있는 동지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고 직원이 잡아당기다가 그 동지가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코를 부딪쳤다. 난간에 일렬로 버티고 선 직원들 사이로 동지들이 비집고 들어갔다. 난간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자칫하면 부서져서 2층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2층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3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몸싸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 번에는 전투경찰들이 난간으로 일렬로 들어서서 철도공사 직원들과 우리들을 난간 안쪽으로 밀어냈다. 치열한 몸싸움이 이어졌고 마침내 우리는 현수막을 난간에 달 수 있었다. 천막이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공연장이라면, 현수막은 그 공연의 제목이었다.
밤이 되어, 전국에서 모인 동지들이 잘 준비를 했다. 콜트콜텍에서 빌려온 깔판을 깔고 침낭을 나누어주었다. 릴선으로 전기를 따오고 멀티탭을 연결하여 전동휠체어를 충전시켰다. 4월 19일 청와대 앞에서 단체 노숙을 한 이후로 올해의 두 번째 노숙이었다. 하루 종일 싸우느라 고단한 몸은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이튿날 우리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대한문 앞의 쌍용차 분향소에서 노사 합의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다음에 광화문에서 리프트 장착 시외버스 시승식이 열렸다. 매해 명절마다 요구했던 것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노래패 시선의 노랫말이 그날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서울역 농성장엔 활기가 넘쳤다. 청와대 농성장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명도 모금도 많이 되었다. 책상에서 동지들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소리 높여 외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전물을 더 잘 받아갔다.
추석 당일에 어김없이 김순석 열사를 기리는 차례를 지냈다.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을 찾는 현수막이 걸린 트러스 앞에 차례상을 차렸다. 서울 거리의 턱을 없애달라는 목소리를 최초로 내었던 김순석 동지가 리프트 장착 시외버스를 하늘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서울역 농성 해단식과 동시에 김동연 장관 찾기 행진 투쟁 선포식을 열었다. 농성 물품을 대항로로 옮겨준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동지들에게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다른 동지들은 서울역에서, 김동연 장관이 사는 공덕동 자이 아파트까지 행진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서쪽 하늘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행진 경로 중간에 있는 사회보장위원회 건물을 전투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김동연 장관이 이곳에서 공덕동으로 이동했으리라! 걷는데 장애가 있는 동지들이 다리가 아프지만 예산을 잘라먹은 김동연 장관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공덕동 자이 아파트의 북쪽 출입구를 전투경찰들이 이중삼중으로 막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 나라 장관을 만난다는데 막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아파트 단지 북쪽 출입구로 들어가서 우리의 목소리를 외치며 다시 남쪽 출입구로 나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활동지원을 24시간 받아야한다. 특히 더웠던 올해 여름에 집에 불이 날까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켤 수 없었던 동지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며칠 전에 국회 앞에서 김주영 동지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제가 끝날 무렵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비옷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영 동지는 뜨거운 불길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활동지원사가 옆에 있었더라면 비가 올 때 비옷을 입혀주는 것처럼 불이 났을 때 그것을 막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충분한 운영비가 필요하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이 탈시설을 해서 지역사회에 집을 얻고 안전하게 이동하여 노동을 하며 생활하려면 그것을 지원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필요하다.
서울역 농성을 접고 국회 농성을 시작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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