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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센터판에서의 6년, 그리고...)

칼럼(센터판에서의 6, 그리고...)

소장 / 서기현
2012년에는 개인적으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따로 살다가 부모님 댁으로 들어왔고, 다닌 지 1년도 안 된 직장을 관두었고, 평생 안 볼 것 같은 친구와 화해를 했고, 친한 후배가 죽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센터판의 소장이 된 것이다.
시작은 그랬다. 평생 안 볼 것 같은 친구와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서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지나가는 말로 '나 드러워서 지금 직장 관둘란다.'라는 말에 그 친구는 대뜸 '너 자립생활센터 소장 해볼래?'라는 제안을 했다. 내가? 에이 농담도 지나쳐... 같이 일 할 때는 사무국장도 안 시켜주던 놈이 웬일? 이라는 의문이 들 때쯤 그 친구의 얘기는 꽤 구체적이었다. 원래는 자기에게 제안이 들어온 건데 고민 끝에 고사하려고 마음먹었고 마침 나를 만난 거라나.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하기 싫은 거구만.. 속으로 욕을 했지만 직장을 관두고 딱히 갈 때도 없었기 때문에 고민해보겠노라고 하고 헤어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느 단체, 기관의 장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평소의 기질을 스스로 느낄 때, 무슨 무슨 장의 모습이라고는 1도 없었기 때문이다. 리더십도 없었고 포용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들었다. 그때까지 겪은 ''들의 모습에 많은 실망감이 들어서 결코 저런 ''은 되지 말아야지. 꼰대, 유아독존, 의심스러운 거래의 흔적, 망나니, 극단적인 이기주의,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나의 ''에 대한 기억들은 나에게 트라우마였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소장이 되어있었다. 나와 활동가 3. 시작은 그랬다. , 사무국장 역할을 해주었던 그 분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 평소에 활동가로서 불합리 했던 것들은 없앴고 나름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밀어부쳤다. 설득도 하고, 화도 내고, 함께 술도 먹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상황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느꼈던 불합리는 그들에게는 익숙함이었고, 내가 혁신을 얘기했을 때 그들에게는 낯섦과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내가 싫어하던 괴물 같던 ''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 문득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평소 알고 지내던 코칭(상담 기법의 일종) 전문가 선생님에게 개인코칭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좋은 리더'가 되고 싶다고, 징징(?)거렸으나 그 선생님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요. 또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그런 조언을 받아들여 '좋은 리더 되기'는 잠시 미루어두고 ''에게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런 과정이 쉬울 줄 알았지만 의외로 아주 힘들었다.. 자세한 것은 개인적인 내용이라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남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차이가 많은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상담 중간에 그만 둘 생각도 했으나 상담 기간 중간을 지나면서 그런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 또한 내가 모르던 부분이고 그러한 사항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에 끝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약 2년 뒤에 본격적인으로좋은 리더 되기 대한 코칭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은 정말 이상형에 가까운 것이었고 실제로 그런 리더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 받고 모든 구성원들에게 사랑을 받는 그런 리더는 이 세상에 없다. 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을 했던가? 라는 자괴감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센터 구성원들은 그런 코칭 과정을 거치면서 소장님이 달라진 게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거냐.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태도가 바뀜으로서 나 자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융통성이 생기고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지난 6년 동안 쭉 함께한 활동가도 있고 중간에 나간 활동가도 있었고 센터에 들어 온지 몇 년 안 된 활동가도 있다. 성격도 다 다르고 성향도 다 다르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르고 심지어 식성도 다 다르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때로는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의 방향과 목적에 동의하기에 이곳에서 지지고 볶고 일을 하는 것 일거다.

본의 아니게 우리 센터는 서울시사업이 3년 단위로 평가 받고 지원 기관으로 선정되는 사이클에 맞춰서 센터운영이 좌지우지 되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두 번째 3년이 마무리 되는 올해 12월까지 지난 6년을 평가하고 앞으로 다가올 3년에 대한 계획을 구성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한다.

앞으로의 3년은 우리센터의 굉장히 중요한 시기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지역 장애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의 권한과 책임은 많다. 소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순 없다. 우리 활동가들과 함께 가야 한다. 모든 활동가들이 나와 함께 즐겁게 주변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센터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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